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7.20 사건 (문단 편집) === 마오쩌둥의 우한행 === 한편 전국 각지에서 조반파들이 무기를 탈취해서 폭동을 일으킨다는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은 7월 13일 오후, 인민대회당에서 린뱌오, 저우언라이, 문혁소조 간담회, 군사위원회 총정비 주임 샤오화, 총참모장 대리 [[양청우]]를 호출하여 "문화대혁명의 군중 발동 단계는 지나갔다. 1년은 시작하면서 넓혔고, 2년은 희망을 보면서 기초를 다졌다. 내년에 끝낸다. 이것이 바로 문화대혁명이다."라고 발언하며 3년차인 1968년에 문화대혁명을 끝내겠다고 발언했다. 이는 마오쩌둥이 [[주자파]]를 숙청하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했고 중국의 혼란상이 도무지 감당불가능한 상황으로 폭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오쩌둥은 이날 자신이 무력투쟁이 격화되고 있는 호북과 호남을 현장시찰하겠다고 밝혔다. 참가자들은 우한의 무력충돌이 너무 심각하여 마오쩌둥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지만 마오쩌둥은 "혼란을 겁내지 않는다. 나는 간다. 양청우는 나와 함께 간다."고 말하고 [[왕둥싱]]에게 전용열차를 준비하게 했다. 베이징군구 부사령관 정웨이산이 수행했다. 이에 7월 14일, [[저우언라이]]가 먼저 비행기를 타고 우한으로 날아갔다. 마오쩌둥은 오전 3시, 전용열차를 탑승하여 베이징을 출발, 밤 9시에 우한에 도착하여 우한 교외 둥후의 공군 초대소 동호빈관 매령 1호에 숙소를 잡았다.또한 쓰촨성 청두에서 공작을 끝내고 마오쩌둥에게 보고를 하러 온 셰푸즈는 백화 1호에, 중앙문혁소조원 왕리는 백화 2호에 숙소를 배정받았다. 천짜이다오와 우한군구 정치위원 중한화는 마오를 경비하기 위해 동호빈관 별관에 머물렀다. 이때 동호빈관 복무원들과 공작원들까지 보수파와 조반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는 터라 동호빈관의 관리 자체가 중지된 상황이었고 미리 비행기를 타고 온 저우언라이가 가까스로 마오쩌둥이 도착하기 전에 마오쩌둥이 머무를 방을 청소하게 했다. 마오쩌둥은 이를 보고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했다. 당장 마오쩌둥이 도착한 다음날에도 전투가 계속되어 10명이 사망하고 45명이 부상당했다. 이를 본 저우언라이는 동호빈관의 경계병을 늘렸으나 접대원들끼리도 서로 싸우고 있으니 안심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저우언라이는 셰푸즈와 왕리를 데리고 천짜이다오를 비롯한 우한 군구의 최고위층과 교섭에 들어갔다. 저우언라이는 조반파를 옹호하며 천짜이다오가 조반파를 탄압한 것을 비판했으나 장령들은 소리를 지르며 저우언라이의 주장에 맞섰고 1차 교섭은 소득이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